성경에 두 번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6장 14절과 출애굽기 2장 3절에 등장하는‘테바(תֵּבָה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 6장에서는 ‘방주’ 로 나오고 출애굽기 2장에서는 ‘갈대상자’ 로 나옵니다. 한글 성경에는 방주와 갈대상자로 구별되어 기록되어 있지만 다실 두 단어는 똑같은 단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방주와 갈대상자는 단어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안에 역청을 바른 것도 비슷하고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도 똑같습니다. 무엇보다 갈대상자와 방주는 선장이 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배와 상자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노도 없고 돛도 없고 닻도 없습니다. 정말 없는 것 투성이라 어떻게 가는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던 그 방주와 갈대상자를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학 중에 기독교 정신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한동대라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의 초대 총장이었던 김영길 교수의 부인인 김영애 교수가 쓴 “갈대상자”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무렵 애굽에서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 모세의 운명도 폭풍속의 촛불 같았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우리 품에서 키운 이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음으로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모세의 부모가 갈대를 꺾어 아기를 누일 바구니를 엮던 그 밤. 그들은 눈물로 통곡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는 죽어야 할 아기를 바로의 딸인 공주의 손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살리셨다. 훗날 민족의 지도자로 모세가 서는데 이 갈대 상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갈대상자를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거기 까지 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해야 될 일은 띄어 보내는 것, 맡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맡기기 시작할 때, 그 때부터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기가 막힌 방법으로 일하셨습니다.

갈대상자가 놓이는 그 시간에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에 목욕하러 나왔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왜 하필 그 시간에 목욕하러 나온 걸까요? 이 타이밍은 너무 빨라도 안 되고, 조금만 늦어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시간에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나왔고 모세를 품고 있던 갈대상자를 보게 되었고 우는 아이를 보고 그 아이가 애굽의 아이가 아니라 히브리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공주의 마음에 놀라운 마음을 심어 주셔서 모세를 살리게 하셨습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 바로의 공주에 심어 주신 마음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출 2:6)

그렇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리고는 그 아기가 아버지 바로 왕이 죽이라고 명령했던 히브리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아기를 강물에 띄운 것은 아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맡기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렁이는 강물과 악어가 득실대는 늪지대에서 모세를 지켜주셨고 요게벳이 하나님께 자녀를 맡겼더니 오히려 바로의 왕궁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맡겨야 책임져 주시고 맡길 때 건져 주십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사람을 ‘던져진 존재’ 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드시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맡김으로 건짐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도 주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