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18
제목 : 성령님과 동행(교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은 우리가 말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찬양하는 시간을 갖고 오늘 본문 말씀 안으로 들어가겠는데요. 여러분 혹시 바둑 좋아하십니까?
여러분 다 아시듯이 이게 바둑판인데요. 바둑에는 급수라는 게 있는데 제일 못 두는 급수가 18급이고 제일 잘 두는 급수가 9단입니다. 제 바둑 급수는 10급 정도 됩니다. 중학교 때 어른들이 바둑 두시는 걸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우다가 친구들하고 바둑을 두면서 바둑을 조금 배웠는데요. 만약에 저하고 1단이 바둑을 둔다면, 바둑을 최고 잘 둔 다는 9단이 아니라 9단보다 한 참 못 두는 1단 하고 바둑을 두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제가 지겠죠. 보시는 그림처럼 제가 저렇게 아홉 수를 먼저 두고 시작해도 제가 집니다. 1단이 눈을 감고 두지 않는 이상 제가 무조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 3 때였던 걸로 기억이 되는데 저도 바둑을 조금 잘 두고 싶어서 책방에 가서 사활 문제집 이라는 바둑 책을 사서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요. 여러분 이 문제를 한 번 풀어보시겠습니까?
지금 흑이 백에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흑이 갑갑해 보이죠? 그런데 지금 흑이 둘 차례에요. 흑이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서 흑 전체가 다 살기도 하고 흑 전체가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 어디다 두면 흑 전체가 다 살 수 있을까요? 정답을 맞추신 분에게는 오늘 점심 친교 음식을 스페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자, 어디에 둬야 흑 전체가 다 살 수 있을까요? 정답은,
저기 왼쪽 밑에 1번 자리에 둬야 흑 전체가 다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아셨습니까? 저는 저 수가 흑 전체를 살리는 수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9단은 이 수를 한 번에 안다고 합니다. 네, 흑이 사는 길을 10급은 모르지만 9단은 압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길, 사람과 가정과, 자녀와, 교회와 이 땅이 살 수 있는 길은 누가 정확히 알까요? 바둑 9단 쯤 되면 정확히 알까요? 아니요. 9단이 아니라 90단이 되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확히 말씀합니다. 내가 살 수 있는 길, 사람이 살고 가정이 살고 자녀가 살고 교회가 살고 이 땅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나를 지으신 하나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 자녀를 주신 하나님, 교회를 세우신 우리 하나님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그 길을 아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줄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 9절입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노라”
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가정이, 자녀가, 교회가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가 싸이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망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 14절 말씀 큰 목소리로 선포하겠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아멘!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편 1절, 2절)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바위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신 줄 믿습니다. 이 말씀에 맞추어서 만든 찬양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라는 찬양인데요. 우리 이 찬양 부르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은혜 안으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님과 동행(교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성령에 관해서 말씀하는 다섯 가지 내용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의 은사,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이 다섯 가지 내용 중에 마지막 다섯 번째,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에 관한 삶’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하나 하나의 내용이 다 중요합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려서 다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짧게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성령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Lord, 주인)와 그리스도(Savior, 구세주)로 믿고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내주하시는 사건’ 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성령님이 내 안에 처음 오시는 사건이고 요한복음 14장 16절이 말씀하는바 그대로, 그 때 오신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 충만은,
‘지속적으로 성령님의 온전한 통치 가운데 살며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능력으로 사는 것’ 을 말하는 데 중요한 건, 성령 충만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성령님의 온전한 통치 가운데 사는 역사’ 이고, 또 하나는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사’ 인데, 성령님이 나를 통치하시고 성령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실 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삶이 변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고, 눈빛이 바뀌고, 표정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물질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사람이 바뀌었다면 그건 성령님께서 그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성령 충만이 임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모습이 있는데 방언이나 신유나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임하고 그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는 것은,
‘성령의 모든 역사 성령 세례와 성령의 임재와 성령 충만과 성령의 통치와 은사가 임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찬양을 할 때나. 말씀을 묵상할 때나, 전도를 할 때나, 설교를 할 때 이 모든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임하기를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할 때나, 설교 준비를 할 때나 심방을 갈 때나, 어떤 사역을 할 때 가장 강력하게 구하는 것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나타나심’ 인데 성령의 모든 은사는 방언의 은사를 제외하고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위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내용이 다 중요합니다. 성령 세례도 중요하고 성령 충만도 중요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도 중요하고 성령의 은사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 바로 다섯 번째,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우리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있어야 성화가 이루어지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우리의 구원과 영생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거라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우리의 구원과 영생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여쭤볼게요. 여러분 구원 받으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100명 조금 안 되게 모였으니까 한 분 한 분 다 여쭤보고 싶은데 제가 조금 짖궂어서 오늘 우리 교회에 아틀란타에서 귀한 손님 두 분이 오셨는데 두 분께 한 번 여쭤볼게요. 김현식집사님, 구원받으셨습니까? 받으셨으면 아멘!, 김집사님 구원받으셨습니까? 받으셨으면 아멘!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고백은 언제나 확실해야 되고 명확해야 되고 분명해야 됩니다. 저는 임종 예배를 드릴 때 이걸 꼭 물어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그거 하나 붙들고 천국 문 앞에 서는 겁니다. 우리가 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Believe in the Lord Jesus,”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여쭤볼게요. 구원은 받았는데 영생은 얻으셨습니까? 어떻게 영생을 얻으셨습니까? 네. 영생도 믿음으로 얻은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네. 영생도 믿음으로 얻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하겠는데요. 제가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 큰 목소리로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줄 믿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이 다 아멘 하셨으니까 한 번 더 여쭤볼게요. 지금 여러분이 다 아멘 하셨고 다 영생을 다 얻으셨다고 그러셨는데 eternal life, 영생이 뭘까요?
“영생은 곧 ( ) 이다.
여러분, 괄호 안에 들어갈 말씀이 뭘까요? 영생은 말 그대로 eternal life 영원히 사는 건가요? 맞습니다.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중에는 그런 분이 절대로 없겠지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믿지 않고 지옥에 갔어요. 그러면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도 영생일까요?
만약에 영생이 영원히 사는 거라고 한다면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도 영생일 겁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 우리가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 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을 뛰어넘는 아주 중요한 다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은 뭘까요?
성경은 영생이 무엇인지를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을 통해서 정확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는데 앞으로 누가 영생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 말씀으로 대답하시면 됩니다. 영생이 무엇인가? 우리 큰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아멘!
영생이 뭐라고요? 영생은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아는 거냐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게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영생에 관한 가장 정확한 대답입니다. 중요한 건 여기서 아는 것이라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머리로, 지식으로, 지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아는 것을 말하는데 이 아는 것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야다’ 라는 말이고 헬라어로는 ‘기노스코’ 라는 말인데 이 말은 누군가를, 지적으로, 영적으로,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제 처를 아시죠? 제 처의 이름도 아시죠? 모르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제 처의 이름은 ‘스칼렛’ 입니다. 그냥 스칼렛이 아니고 스카알렛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제 처가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이제부터 자기를 민숙이라고 부르지 말고 스카알렛 이라고 불러달라고… 그러니 이제부터 여러분도 제 처를 스카 칼렛이라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네. 여러분도 제 처를 알고 저도 제 처를 알지만 여러분이 제 처를 아는 것과 제가 제 처를 아는 게 같을까요? 아니요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처럼 여기서 말씀하는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지적으로, 영적으로,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지적으로, 영적으로,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뭐라고 말하냐면,
‘인격적으로 안다. 인격적으로 만났다. 인격적으로 체험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 번 더 여쭤볼게요. 영생은 천국에 가야면 누리는 걸까요? 지금 여기서도 누릴 수 있는 건가요? 영생은 지금 여기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영생은 지금 여기서 누려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찬양하잖아요.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함께 살리라.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함께 살리라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 가리라
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이 찬양 그대로 장차 가게 될 하늘나라에서 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모든 삶 속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인데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우리가 연구하고 공부하고 생각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입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누가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고요? 지혜와 계시의 영 되시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영생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이 영생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이 인격적이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건, 성령님이 인격적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떤 감동이나 느낌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인격적이라는 것은 뭘까요? 여러분 이 보면대는 인격적인가요? 인격적이 아닌가요? 아니죠. 그러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인격적인 존재인가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가요? 강아지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강아지를 너무 좋아하는 분들은 강아지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기도 하지만 그래서 어떤 강아지는 지가 사람인 줄 알고 사람 대접을 받으려고 그러는데 강아지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강아지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냐면, 강아지는 나무를 볼 때마다 전봇대를 볼 때마다 다리가 올라가잖아요. 걔들은 왜 그렇게 다리를 드나 모르겠어요. 네. 강아지는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인격적인 존재일까요? 아닐까요? 고민하시는 분이 계시는 것 같아요. 저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저 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격적으로 대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뭐를 기준으로 보면대나 강아지는 인격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사람은 인격적이라고 말할까요? 그 안에 세 가지 모습이 있을 때 바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있을 때, 짧게 그 안에, 지, 정, 의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존재를 보고 인격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건, 성경이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뭐냐면, 성령님은 지식을 갖고 계신 분, 지적인 분이라는 것이고 감정을 갖고 계신 분이시고,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너무 중요한 게 뭐냐면,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고 교제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성령님이 우리와 똑같이 지, 정, 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고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이 지식을 갖고 계시고 지적인 분이라는 것을 뭘 보면 알 수 있을까요? 성경 곳곳에서 성령 하나님이 지식을 갖고 계시고 지적인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요. 그 대표적인 말씀이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면서 거짓말을 했을 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그러면서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성령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성령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보면대가 저를 속이지 않고 저도 보면대를 속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님은 인격을 갖고 계시고 지식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 하나님이 감정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요. 이사야서를 보면,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할 때 성령께서 근심하셨다고 말씀하고 에베소서를 보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로마서 8장 26절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정말 아픈 마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감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면서 복음의 방향을 유럽으로 바꾸어 버리시는 모습을 통해서 성령님이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성령님이 인격적이신 분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우리가 다시 한 번 이 질문,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라고 하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너무 은혜롭게 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라는 찬송인데요. 이 찬송가 3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누가 나와 동행하실까요? 성령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시작,
주의 영, 성령이 나와 동행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심지어 성령님께서 내 모든 염려도 다 아신다고 찬양했는데 그러면 당연히 이 질문,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라는 이 질문에 대해서 ‘네. 나는 성령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셔야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여러분 설마 성령님과 동행하지도 않으면서 노래만 이렇게 부르신 거 아니죠?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어떤 분이 권사님께, ‘권사님, 죄송한데요. 제가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정말 잘 몰라서 여쭤보는데요. 권사님은 성령님과 어떻게 동행하고 계세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하고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성령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죠?’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냐는 겁니다. ‘거 씰데 없는 얘기하지 말고 교회나 열심히 나와요. 나중 되면 다 알게 되니까 처음부터 너무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일단 교회나 잘 나오세요’라고 이렇게 얘기하시지는 않겠죠?
네. 물론 어떤 분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게 성령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증거다. 내가 어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고 내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건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성령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는 증거다라고 얘기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또 어떤 분은 내가 이렇게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섬기는 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증거다 라고 말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의 뜻은 그냥 막연히 성령님이 계시겠지, 성령님이 인도하시겠지, 성령님이 함께 하시겠지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이고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친밀한 교제라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고 성령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데 그런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 믿으면 다 되는 거 아니야? 교회 나오면 다 끝난 거 아니야?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 나의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라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성경책에나 나오는 어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 속에서 자기가 직접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내가 성령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는 삶을 살기 위한 영적인 원리와 성령님과 동행하고 교제할 때 어떤 열매가 맺히고 어떤 역사가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떤 느낌이나 능력만이 아니라 나와 동행하시고 교제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언제나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며 믿음의 삶을 살고 은혜와 축복과 능력과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